Sutra:
The Buddha told Subhuti, “So it is, so it is. If someone hears this sutra and is not frightened, or alarmed, or terrified, you should know that person is most rare. And why? Subhuti, the foremost paramita is spoken of by the Tathagata as no foremost paramita, therefore it is called the foremost paramita.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렇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이 사람은 매우 경이로운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여래는 최고의 바라밀(波羅密)을 최고의 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였으므로 최고의 바라밀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Subhuti, the paramita of patience is spoken of by the Tathagata as no paramita of patience. Therefore it is called the paramita of patience. And why? Subhuti, it is as in the past when the King of Kalinga dismembered my body, at that time I had no mark of self, no mark of others, no mark of living beings, and no mark of a life.”
수보리여! 인욕(忍辱)바라밀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온 몸을 마디마디 잘렸을 때, 나는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Commentary:
After the Buddha had heard Subhuti’s explanation he said, “So it is, so it is.” You think that way, and I think that way, too. The doctrine you speak is correct.
부처님은 수보리의 설명을 듣고 나서, "그렇다. 그렇다."라고 말했습니다.”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교리는 정확합니다.
“If someone hears the Vajra Prajna Paramita Sutra and is not frightened, or alarmed, or terrified.” Why would it frighten people? Ordinary people have always been attached to the mark of self, so if they are told there is no self they are very frightened. “What!” they exclaim, “Where did I go? How can there be no me? I am always here. How can I, myself, not exist?”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왜 사람들을 두려워하죠? 보통 사람들은 항상 아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자기라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매우 두려워합니다. "뭐라구!"라고 그들은 외칩니다. "내가 어디로 갔지?" 어떻게 내가 없을 수가 있죠? 나는 항상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Those of the Two Vehicles have realized the emptiness of self, but have not yet realized the emptiness the dharma. When they hear that “Even the dharma should be relinquished” they become terrified. “How can I give up the dharma? If I cast aside the dharma, what will I use in cultivation? I will not have anything.”
이승의 수행자들은 아공我空을 깨달았지만 아직 법공法空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법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법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만약 내가 법을 버린다면, 나는 수행에 무엇을 사용할 것인가요? 나는 아무것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Although fully accomplished Bodhisattvas have certified to the emptiness of self and the emptiness of the dharma they have not obtained the emptiness of emptiness. They have not realized that emptiness also must be emptied. With emptiness still remaining, there is an attachment to it. The Buddhadharma teaches not to be attached to self and not to be attached to phenomena. However, when there is no self and no phenomena, emptiness arises. Involvement with that emptiness can cause one to be waylaid by it. Loitering in emptiness, stopped in stillness, one simply guards the emptiness within which one dwells. That is also a mistake. So when Bodhisattvas who have not realized the emptiness of emptiness hear of real mark, the principle substance of prajna which does not even admit of emptiness, they also become alarmed and terrified.
성취한 보살들은 아공과 법공을 증득했지만 구공俱空은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공 또한 비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공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것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불법은 자아에 집착하지 말고 현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아가 없고 현상이 없을 때 공이 생깁니다. 그 공에 관여하면 그것에 의해 도를 잃을 수 있습니다. 공 속에서 어슬렁거리고, 고요함 속에서 멈춰서, 단지 자신이 머무는 공을 지킬 뿐입니다. 그것 또한 실수입니다. 그래서 구공을 깨닫지 못한 보살들은 공조차 인정하지 않는 반야의 이치의 체인 실상에 대해 듣게 되면, 그들 역시 경악하고 공포에 떨게 됩니다.
A person who hears the sutra and is not frightened, or alarmed, or terrified understands the true proper dharma of prajna paramita. Therefore Sakyamuni Buddha said, “You should know that person is most rare.”
경전을 듣고도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은 반야 바라밀의 진정한 바른 법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사람이 가장 매우 경이로운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Someone with a little merit and virtue who displays it and advertises himself like Emperor Wu of the Liang dynasty is stupid and has not understood the dharma door of prajna in which everything past is gone. If you cling to even one tiny portion, you have obstructions. The Heart Sutra says, “Because there are no obstructions there is no fear.” If you harbor merit and virtue in your heart, there is an obstruction. If “inverted dream-like thoughts are left far behind” you have no obstructions. “Because there are no obstructions there is no fear.” “Fear” refers to being frightened, alarmed, or terrified. When “inverted dream-like thoughts are left far behind…ultimately nirvana” is obtained. That is the extremely wonderful doctrine of the Heart Sutra.
양무제처럼 과시하고 자신을 선전하는 약간의 공덕이 있는 사람은 어리석고 과거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반야의 법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매달리면 걸림이 생깁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공덕을 가슴에 품으면 걸림이 있습니다.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면" 걸림이 없습니다.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은 겁을 먹거나, 놀라거나, 무서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궁극적으로 열반"을 얻습니다. 그것은 반야심경의 아주 훌륭한 교리입니다.
Sakyamuni Buddha asked Subhuti, “Why is the person who hears the sutra and has no fear most rare?” Then he explained that it was because the foremost paramita is spoken of by the Tathagata as no foremost paramita, therefore it is called the foremost paramita. The foremost paramita refers to the perfect principle of the Middle Way, which if viewed in light of common truth is the foremost paramita. If spoken of from the point of view of actual truth, it is no foremost paramita, because actually there is absolutely nothing, not even a foremost paramita. Therefore it is called the foremost paramita. If regarded from the point of view of perfect truth, the Middle Way, it is given the name “foremost paramita,” and that is all.
석가모니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경을 듣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왜 매우 경이로운 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바라밀이 최고의 바라밀이 아니라고 여래에 의해 설해졌기 때문에 최고의 바라밀이라고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최고의 바라밀은 중도의 완벽한 원칙을 의미합니다. 중도는 공통의 진리에 비추어 본다면 최고의 바라밀입니다. 만약 실제 진리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바라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심지어 최고의 바라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최고의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완벽한 진실, 즉 중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최고의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그뿐입니다.